티스토리 뷰

전혜린,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민서출판사, 1984.

홀로 걸어온 길, 30쪽
그러나 운명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곳으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우리의 의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자유롭지는 않다. 우리가 생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생이 우리를 형성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기치 않았던, 때로는 소망치 않는 방향과 형식 속에 생이 형성해 놓는다. 논리의 수미(首尾)가 일관된 생을 우리는 희구한다.
그러나 생의 테제와 안티 테제는 논리에서처럼 당연한 일의적 단계를 밟지 않는다. 그러기에는 생은 너무나 혼돈적이고 어두운 밤의 측면과 꿈과 동경……으로 가득 차 있다.
작은 우연이 일생을 결정하기도 한다. 인간은 유리알처럼 맑게, 성실하고 무관심하게 살기에는 슬픔, 약함, 그리움, 향수를 너무 많이 그의 영혼 속에 담고 있다.



덫에 걸린 세대, 104-106쪽
무서운 불안과 공포감을 가지고 그들은 그들 자신으로부터 도피하고 있다. 그들은 마취를 찾는다. 절대로 혼자여서는 안 되니까, 고독만은 필사적으로 피해야 하니까, 자기 자신과의 대면이 무서운 것이다. 중세기를 벗어난 사랑에서 남은 것은 성 뿐이다.
믿는 것은 자기 뿐이고 자기 표현의 한 방법으로 성을 택한 것 뿐이다. 정신까지 다 준다는 일은 생각도 안 해 본 문제다. 아니 그것은 극력 피하고 있는 공포의 대상이다. 그들은 애정을 받아 보지 않았고 애정을 절망적으로 필요로 하고 있으므로 애정을 남에게 줄 수도 없고 애정을 견딜 줄도 모른다. 이렇게 되면 성은 결국 무의미성의 막다른 골목 속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중략)
현상적 존재로서만 자기를 받아 들이는 것에 대해 아무런 불만이 언제까지나 싹트지 않을 것인가? 이것은 미지에 속하는 문제다. 다만 확실한 것은 독일의 젊은이 뿐 아니라 온 세계의 젊은이는 자기 모순에 시종하고 원을 긋고 달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유로 믿는 것이 결국 가상에 불과할 때가 허다하고 진보와 동시에 퇴보가 약속되어 있다.
(중략)
결국 누구나가 자기의 쥐덫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개인의 쥐덫, 그리고 그밖으로는 인류의 운명이라는 역사성 시간성의 쥐덫이 놓여 있다.
죽음을 내포한 존재인 인간에게는 현명한 케스트너가 가르치듯 밖은 보지 말고 즉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려고 시도하지 말고 자기의 내부에 파고드는 것, 내적 관조에 의해서 어떤 체념적인 긍정을 얻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일 것이다.




2008.2.12.

'덫에 걸린 세대'는 전혜린이 독일에서 유학할 때, 전후 세대였던 독일의 청소년들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으로, 철학적으로 접근했던 글이다.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그런 일들과 시간이 존재하며, 스스로에 침잠하여 관조해야 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은 맞다. 그렇지만 언제까지나 자기 안에 갇혀서, 자기 안에 가라앉아서만 지낼 수는 없으며, 한계에 부딪히더라도, 그래서 좌절감을 무수히 반복한다 할지라도 맞서서 멍들고 피나고 깨져야 하는 게 인간이 아닐까. 그런 과정을 겪다 보면 금이 가고 조각이 떨어져 나간 뒤에 조금은 더 단단해지지 않을까. 체념적인 긍정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체념이 아닌, 내 의지와 내 선택이, 설령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래도 끝까지 시지프스의 신화를 갈구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전부가 아닐까.

이 책을 읽는 내내 체한 듯한 답답함이 계속 남아 있었다. 그것은, 나는 이 사람의 죽음에 관한 흔적을 찾고자 했던 내 욕심과 계속 마주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결코 회의적이지도 않았고 결코 폐쇄적이지도 않았다. 열정적이었던 자신의 젊음을 사랑했고 그리워했다. 진실했을 것이다. 내 의심이 헛되다고 비웃음을 살 만큼 자신의 글에, 삶에, 진정으로 진실했을 것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겠다. 그래서 더 안타깝다.

이 책을 읽고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를 읽었다. 전혜린의 번역과 민음사에서 나온 번역을 둘 다 읽었다. 전혜린의 번역본이 더 좋았다. 책의 주인공이 곧 전혜린 그녀 자신인 것 같아서.



댓글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