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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 소설집, 침이 고인다, 문학과지성사, 2007.


2008.9.22.

김애란의 두 번째 소설집을 사고 촤르르 손끝으로 넘겼을 땐, 처음에는 이상문학상과 현대문학상 2년에 걸친 소설집에서 이미 읽은 소설이 세 편이나 돼서 사기당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미 그 끝을 다 아는 이야기니 지루할 것 같았는데 좋은 소설은 몇 번을 읽어도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표제작이 제일 좋았다.

도망치고 싶었다. 지난 시간의 내 모습에서, 그때의 나만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그때의 경험들에서, 아픔들에서 멀리 도망치고 싶었다. 경험을 헤집지 않고, 그때의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나 있으면, 그러면 해결될 줄 알았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고, 여러 일들로 인해 결국은 보다 강해졌고 타인을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은 사실이었지만 어디까지나 내 안을 들여다보길 싫어하는 나로서는, 체면치레와 같은 소리였다.

아픔과 상처와 그 흔적이란 것들, 따지고 보면 우연과 필연이 뒤섞인 무수한 흐름 속 한 점에 불과한 것인데도 바늘로 콕콕 파내도 뽑히지 않는 점처럼 삶에 콕 박혀서 다시금 오래 아팠다. 거기에 그 순간 함께했던 또다른 감각은 그와 얽혀서 생각이 아닌 감각으로 그것을 몸으로 느끼게 했다. 그래서 어떻게든 아픔과 상처를 보지 않으려고 또 벗어나려고 몸을 사리고 안간힘을 쓰게 되는가 보다. 그러나 소설과 음악에서 마주하기 싫은 불편함을 자꾸 느끼면서도 또 떼어내지 못하고 수용하며 찾기까지 하고 있으니, 결국은 벗어나지 못하나 보다. 투명해지려면, 후배처럼 투명한 목소리로 내 안을 드러낼 수 있으려면, 나는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을 거쳐야 하고 얼마나 많이 그것과 마주쳐야 할까. 이 두려움을, 언제쯤 나는 내려놓을 수 있을까.




<침이 고인다>

p.61.
그날 이후로 사라진 어머니를 생각하거나, 깊이 사랑했던 사람들과 헤어져야 했을 때는 말이에요. 껌 반쪽을 강요당한 그녀가 힘없이 대꾸했다. 응. 떠나고, 떠나가며 가슴이 뻐근하게 메었던, 참혹한 시간들을 떠올려볼 때면 말이에요. 응. 후배가 한없이 투명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도 입에 침이 고여요.”


<도도한 생활>

p.15.
체르니라는 말은 이국에서 불어오는 바람 같아서, 돼지비계나 단무지라는 말과는 다른 울림을 주었다. 나는 체르니를 배우고 싶기보단 체르니란 말이 갖고 싶었다.

p.33.
도 다음엔 레가 오는 것처럼 여름이 끝난 후 반드시 가을이 온 것 같았지만, 계절은 느릿느릿 지나가고, 우리의 청춘은 너무 환해서 창백해져 있었다.


<평론 - 나만의 방, 그 우주지리학, 이광호>

pp.290-291.
타인의 깊은 외상적 기억을 공유한다는 것은 이중적이다. 그것은 타인과의 깊은 소통과 유대의 계기를 만드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그 외상적 기억을 공유해야 한다는 책무감, 혹은 자신도 그 사람에게 그런 외상적 기억을 공유해야 한다는 책무감, 혹은 자신도 그 사람에게 그런 외상적 기억을 말해야 한다는 부채감이 작동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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