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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하루

캐롤, 손과 등

늠름 2016.02.15 23:02

1.
금요일 밤, 캐롤을 보고 왔다. 어쩌면, 영화 자체보다 영화 보고 집까지 타박타박 걷는 길을 나는 더 좋아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서울에 오고 나서 시간을 얻었다. 책과 영화를 조금 더 가까이 두고 살았다. 타인의 이야기가 내 행간이 되길 바랐다. 내가 조금은 더 북적이길 바랐다.

영화가 끝나고 밤 열두 시, 붐비던 신촌길이 한산했다. 좋아하는 머플러를 둘렀다. 봄을 부르는 겨울비가 촉촉했다. 오늘의 걸음에, 시청에서 광양을 걷던 어제의 길이 포개졌다. 길도 마음도 붐비지 않았다. 낯설지 않은 오늘의 마음이, 오늘의 밤이 총총 수놓이면 나의 밤과 낮은 얼마나 든든할까. 문득 그런 생각도 했다.




2.
내 눈을 온전히 보아주는 사람.
내 어깨에 지긋이 손을 얹어주는 사람.

영화를 보기 전 이병률의 시를 옮겨 적어서였을까. 테레즈의 어깨에 얹는 캐롤의 손에 넓은 등이 포개졌다.
아주 넓은 등이 되고 싶었다. 실은 아주 넓은 등을 갖고 싶었다.

캐롤은 딸의 손을 놓았다. 엄마로서의 다른 한 손은 놓지 않았다. 테레즈는 싱크대 아래 묵혀둔 사진을 세상으로 꺼냈다. 두 사람의 온기는 엄마와 딸 같기도 했고, 친구 같기도 했고, 그리고 애틋한 연인의 마음이었다. 눈빛 아래, 숱한 감정과 생각과 맥락 들이 잠겼겠지만, 두 사람은 행복했다고 믿는다.

사랑하는 일도, 헤어지는 일도, 결국은 행복해지려고 하는 것일 텐데. 여러 사람의 여러 마음이 귀결되는 것이, 결국은 행복인 듯해서. 서로 다른 곳에 닿더라도.

양육권을 두고 심리치료를 받는 캐롤이 나는 아팠다. 마음이 같지 않음을 알면서 놓지 못하는 남편을 보면서도 아팠다. 여러 상황에 감정 이입이 됐다. 이것은 영화일 뿐인데 싶으면서도, 크고 작은 사람들이 각자의 삶을 잘 살아가길, 덜 아프길 바랐다.




3.
눈이 닿는, 손이 닿는, 온기가 사랑이겠지.
온기는 누구에게도 평등하겠지.
석석한 내 손과 등에 좀 더 온기가 배어 있기를 바랐다. 

이병률, 아주 넓은 등이 있어

시를 다시 오래 읽었다. 나도 삼백 년 얼굴을 묻을 수 있는 등이 되고 싶었다.


2016.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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