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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하루

담박(淡泊)

늠름 2016.02.10 15:33
1.
고등학교 한문 선생님은 淡泊, 단어가 좋다고 했다. 맑을 담. 머무를 박, 배댈 박, 그리고 잔물결 백. 담백하다고 보통은 많이 읽는데 박으로 읽을 때 뜻이 좋아 부러 담박이라고 읽는다고 했다. 열일곱 살, 한문 시간 대부분을 졸면서 보낸 것 같은데 이날의 수업은 눈에 지금도 선하다.
담박한 사람.
담박한 사람이 되고 싶은데 다닥다닥 붙은 것이 너무 많았다.



2.
마당에 앉아 볕을 쬐다가 손에 눈이 닿았다. 툭 터지고 아물며 생긴 손의 흉터들을 보다가, 상처와 딱지와 흉들이 거추장스럽다고 생각을 하다가, 부끄럽다고 생각을 하다가, 문득 한문 선생님의 말이 생각났다. 

불거지고 붙은 것들이란 부끄러운 걸까. 부끄럽다고 생각하고 살고 있을까, 나는.



3.
실레마을에서 다섯 날을 살았다. 여덟 시면 일어나 어기적거리다가 뒷짐 지고 어슬렁 어슬렁 마을길을 걸었다. 걷다 들어와 밥을 먹거나, 밥을 먹고 슬슬 걸었다. 책을 읽고 끄적거리고 졸았다. 냉장고처럼 책장처럼 붙박이로 조용히 한곳에 붙어 지냈다. 다닥다닥 붙은 생각이 떨어졌다. 새 생각이나 덮어둔 생각이 다닥다닥 다시 붙었다.

붙은 생각에 흉이 질지 살이 돋을지 바라볼 시간이 필요했다. 

오른손의 흉들이 영 아물질 않았다.
어디든, 새살이 잘 돋길 바랐다.



4.
다섯 날의 풍경들이 담박했다. 

누워서 책 읽기.

네 이름은 해피. 지날 때마다 컹컹 짖더니 이날은 이상하게 졸졸 따라붙었지. 손을 허락한 딱 하루. 다음날부턴 다시 컹컹컹.

지난 주에 왔을 때 잘 따랐던 흰둥이. 차에 다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내내 좋지 않아 며칠 길을 걸으며 계속 찾았다. 다리를 절지도 않고 누렁이와 잘 노는 모습을 다시 보았다. 마음이 푹 놓였다. 고마웠다.

금병초등학교에는 토끼와 닭과 오리가 같이 살았다. 안녕, 나도 토끼야. 토끼띠.

내 좋은 벗. 

밤 산책. 무서워서 김유정역 기찻길 주변만 살짝 걸었다. 걷다가 별똥별을 보고, 오리온자리를 보고, 황소자리를 보고. 내맘대로 북두칠성 국자도 그어보고.

서른 살 생일을 조용히 맞았다. 지갑 사진 자리에 넣어두었던 스무 살 생일 편지. 인숙언니의 편지를 꺼냈다. 사라지고 싶었던 열몇 살 생일들이 있었다. 오래 지우고 지내며 덤덤해졌다고 생각하고 살았다. 나는 덤덤했던 게 맞을까, 조금 쓸쓸하기도 해서, 인숙언니가 보고 싶어서, 편지를 한참 매만졌다.

'그가 살았을 때에도 나는 그에게 잘하지 못했는데, 그가 간 후에도 이렇게 잘못이 많다.'

공지천. 장갑이 귀처럼 달렸다. 윗몸일으키기 하다가 깜박 잊었을까.

상상마당의 독립출판 전시. 플립북 보며 냉면을 좋아하는 사람 생각.

코끼리책 읽기. 할머니의 뒷모습이 마음이 넘치게 사랑스러웠다.


도랑에서 먹이 찾는 청둥오리 떼들을 만났다. 이십 분 쪼그려앉아 한참 보며 마음이 평온했다. 돌아보면 평온했던 한 시절의 기억으로 굴곡을 넘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가만히 앉은 지금의 시간이, 또 어느 때에 그 시절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잣나무숲에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앉고 싶었다. 한 뼘 떼어 주머니에 넣어오고 싶었다.

제대로 미끌어지고 나서 길동무가 찾아준 나무지팡이. 까실하고 폭신해서 손에 쥐고 걸은 잣방울. 산에 돌려놓고 내려왔다. 

일상다반사의 강아지. 꾸벅꾸벅, 어찌나 예쁘게도 졸던지.

우문하우스 마당에서 몸을 데우는 볕이 좋아서, 한 곡만 더, 한 곡만 더, 노래 들으며 한참 앉아 볕바라기했다. 따끈한 볕에 생각이 모락모락 자랐다. 


2016.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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