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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하루

김유정역, 실레마을

늠름 2016.02.01 00:55

보름 전, 오래된 필름 사진을 보다가 김유정역 사진에 마음이 닿았다. 1월 마지막 날에는 경춘선을 타겠다고 혼자 다짐했다. 다짐까지 할 만큼 큰 일도 아니었지만, 움츠러든 때에 다짐이 거듭 필요했다. 생각한 다음날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했고, 그 다음날 휴가원을 미리 냈다. 한동안 잘 쉬지 못했다. 일보다도 실은 건강하지 못한 책무감과 불어난 생각이 문제라는 걸 알았다.


2016.1.29.
긴 정산 일을 마치고 하루 연차를 쓴 날. 열한 시까지 늘어지게 잤다. 느지막히 나와 서강대역에서 상봉역으로, 김유정역으로 경의선에서 경춘선을 갈아탔다. 두 시 넘어 김유정역에 내렸다. 우문하우스로 가는 길, 강아지가 갑자기 달려들었다. 쓰담쓰담 예뻐하고 있는데 동네 꼬마들이 우르르 와서 왜 고모한테는 가고 우리한테는 안 오냐며 울상을 지었다. 와르르 뛰어가니까 강아지가 무섭지, 손내밀어 강아지가 냄새 맡게 해봐. 꼬마들과 함께 와르르 웃었다. 강아지는 점순네닭갈비로 총총총 달렸다. 꼬마들도 달렸다. 아이들과의 대화가 오랜만이라 꽁무니를 오래 보았다. 달리는 모습들이 그립고 좋았다.

짐을 풀고 옛 김유정역과 실레마을을 걸었다. 팔십삼 년 태어난 중고카메라를 들고 오 년 전 보았던 풍경과 같고 다른 풍경을 헤아렸다. 네 시 반에 국밥집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뉴스를 보며 식당 어머님들의 아이고, 아이고, 하는 수다를 들었다. 마음이 조금은 허해서 밥 한 톨도 안 남기고 싹싹 긁어먹었다.

춘천의 겨울은 해가 일찍 떨어졌다. 여섯 시 반이면 문을 닫는다는 찻집에서 나와 숙소로 돌아왔다. 아가씨 밥때 밥먹어야 하는데 맥주를 산다고 말을 붙이는 슈퍼 아주머니께 이른 저녁을 먹었다고 웃었다. 늦은 점심이니 저녁도 맞았다. 잘 쉬라는 인사를 받았다. 네 여자 방에 묵는다. 작고 조용한 방, 그리고 밤. 침대에는 짐들을 널부러두고 이불 끌고 내려와 온돌 바닥에 기대앉았다. 홍차 마시고 들어와 캔은 아직 따지도 않았는데, 궁둥이가 따뜻하니 졸음이 솔솔 온다. 종일 뽈뽈거렸더니 아직 속이 부르다.

오 년 전 초가을에 탔던 경춘선은 초록이었는데, 겨울의 경춘선은 먹색과 하양.

침대 자리마다 붙은 글. "시간도 때론 지쳐 쉬어가는 법이다" 문장이 좋아 여기에 짐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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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30.
여덟 시부터 자다 깨다, 늘어질 수 있는 아침이 아쉬워 한참을 굴렀다. 아홉 시 반까지 버티다 씻고 열 시 넘어 길로 나왔다. 우문하우스에서 닭갈비 집들을 지나 풍류길 작은 골목을 걸었다. 어느 집 바깥에 있는 쇼파에서는 강아지 두 마리가 해바라기를 했다. 어제는 세차게 짖었는데 오늘은 월월 두 번 하고 둘이 기대 볕을 쬐었다. 어느 담 조각 볕이 내리는 자리에는 주먹만한 강아지 둘이 몸을 포개고 오들오들 떨며 볕을 쬐었다. 사진을 찍고 싶어 한 팔 거리를 두고 앉았다. 추워서일지 무서워서일지, 더 떠는 것 같아 미안해서 금방 일어섰다. 자박자박 걷는 길마다 흰둥이가 누렁이가 바둑이가 총총 뛰고 섶을 구르고 놀았다. 희고 검은 닭들이 울었다. 동물들이 보여 좋았다.

밭길을 따라 문학촌 주변을 살짝 걸었다. 달라진 풍경을 눈으로 세었다. 묵은 마을집 건너 건너 신식 건물이 생겼다. 한가운데 돔을 올린 공연장이 생겼다. 길 건너 철골과 콘크리트가 섰다. 문학촌 지나 밭담에는 천만 인 서명 현수막이 날렸다. 노란 볕도 여전하고 아담한 생강나무도 여전한데 달라진 풍경이 눈에 설고 마음이 채였다.

오늘은 서울 넘어갔다 다시 돌아왔다. 이틀 숙박을 잡고 돌아가면서 무리를 했나 싶어 집으로 갈까  고민을 했는데, 평내를 지나고 청평을 지나고 어제오늘 귀에 익은 역들을 지나면서 돌아오길 잘했다고 마음이 편해졌다. 경춘선 앞자리 의자에는 아저씨가 아주머니 무릎을 베고 졸았다. 나도 잠깐 졸던 새 투닥거리셨을까, 의자 양끝에 따로 앉아 등까지 돌리고 졸았다. 의자를 마주 앉은 셋이 졸았다. 나도 졸았다.

열한 시 반. 강아지 대신 별이 총총 내리는 길을 지났다. 우문하우스 마당에 별이 쏟는다. 별바라기 하다 고개가 아파 들어왔다. 늦은 밤 맞이해준 우문지기가 반가워 말을 붙였다. 오늘은 별밤. 어제의 일기도, 오늘의 일기도 졸림. 아 졸리다 내일은 일찍 일어나야지. 꼭 그렇게 맺던 일고여덟 살의 일기장처럼. 걷고 말도 없고 졸린 하루여도, 소소한 기억이 어느날 그리울 것 같아 별스럽지 않아도 꾹꾹 적어두었다.

서울 다녀오는 길. 집은 역앞에 두고 나들이 다녀오는 것 같았다.

별이 쏟아지던 밤길. 어둔 밤이 무서울까봐 강아지라도 총총 나왔음 실없는 생각을 했는데, 별바라기 하며 걷는 길이 외롭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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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31.
어제도 오늘도 구성진 뽕짝에 아침을 맞았다. 몇 소절 흐르다가 딩동댕동 하고 증1리 마을회관의 안내방송이 나왔다. 방송이 끝나고 노래는 계속 이어졌다. 어제보다 늦게 잠들고 늦게 일어난 아침, 오늘 아침은 네 여자 방이 다 차서 뒤척이지는 못하고 눈만 간신히 비볐다. 노래가 그만 일어나라고 하나 싶어 살금살금 채비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뽕짝은 노동요였다. 이장님은 트랙터를 몰고 어느 아저씨는 비료 차를 몰고 밭에서는 아저씨들이 낙엽불을 쬐었다. 노랑 주황 등산복을 입은 어른들이 산행을 했다. 따라가면 길을 찾겠거니 싶어 멀찌감치 붙었다. 흙길이 나오고 더 따라가다가는 나도 금병산을 탈 것 같아 갈림길에서 혼자 떨어져 나왔다.

실레이야기길, 김유정의 소설 장면들이 이름 붙은 길을 걸었다. 응오가 자기 논의 벼 훔치던 수아리 길을 올랐다. 얼음 저수지를 한참 구경했다. 저수지를 가로지르는 발자국들에 설마 빙판을 건너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얼음이 쩍쩍 갈라지는 상상을 했다. 저 발들은 누구의 발이었을까.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 주변을 헤매다가 산길을 찾았다. 산신각 가는 산신령길을 지나 도련님이 이쁜이와 만나던 수작골길로 내려갔다. 점순이가 나를 꼬시던 동백숲길로 가야 하는데 길을 잃었다. 한참을 좁은 길을 오르고 내렸는데 길이 아닌 곳을 길이라 생각하며 걸었나 보았다. 저수지가 다시 나왔다. 저수지만 한 바퀴 돈 셈이 되었다.

걸은 길을 되짚어 마을로 내려왔다. 나와 점순이가 엎어지며 알싸한 꽃향기 나던 자리는 못 찾았지만 나뭇잎끼리 부딪는 소리, 콩새일지 박새일지 작은 새들이 나무씨앗 쪼아먹는 소리, 부스럭 파다닥 콕콕 픽 푸르륵 삐익삐익, 다정한 소리를 넘치게 들었다.

역전 우동을 먹고, 일상다반사에서 책을 읽고, 첫날 길에서 총총 따라왔던 강아지를 다시 만나 몸부비고 쓰다듬으며 같이 놀았다. 우문하우스에서 짐을 맡아주어 길을 편히 걸었다. 배려가 고마워 작은 인사를 끄적이고 나왔다. 작은 여행이 아쉬워 기차를 기다리며 마을을 한참 보았다. 잃은 길이 못내 아쉬웠다. 다락방 가득한 책들을 못 읽은 일도 못내 아쉬웠다. 일요일의 해가 기울었다.

실레마을에서는 골드스타 G7으로 울트라맥스 400 두 롤을 썼다. 사진관에 가려고 두 번째 필름을 감는데 헛도는 느낌이 쌔했다. 손에 익지 않은 카메라를 들고 간 게 모험이었다. 둘째 셋째 날 찍은 사진들은 아무래도 다 잃어버렸나 보다. 또 놀러가서 사진 찍으면 되지, 다시 갈 이유가 하나 더 늘었는데 마을 강아지들 사진을 잃은 건 가장 아쉽다.

조용한 길을 걸으며, 말을 아끼며, 생각이 붐비지 않았으면 했다. 놓았다 잡았다 다시 놓았다. 공허한 책무감들을 잠시 내려두고 싶었다. 나는 잘 지내고 있을까. 문장을 맺지 못하던 생각도 내려놓았다. 자박자박 걷는 걸음에 생각도 바스러졌다. 평온한 시간을 보냈다. 충분했다. 괜찮았다. 그러니 내 일상도, 괜찮을 거다. 


내일은 제천 출장. 출장이 끝나면 다시 후드득 후드득 일이 많다. 커피를 물처럼 마실 때에 그제부터 사흘의 풍경을 나는 한참, 만지작거릴 테지. 만지작거릴 수 있는 기억으로, 일상을 또 잘 지내야지.

저수지에 홀렸는지, 이때부터 길을 헤맸다. 돌고 돌아와 다시 저수지.

인사를 못하고 나왔다. 하얗고 하늘하늘한 저 원들이 좋았다. 여름날 마당이 참 예쁠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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