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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너는 나로 인해 죽는다.”

계절에 따라 크게 네 장으로 나뉘어 있고, 계절과 사람들 마음의 얽힘에 대한 기록으로 보아야 할까, 계절 이야기를 모토로 시작하여 그 안에는 여러 인물들의 목소리가 차곡차곡 쌓여 있다. 종횡으로 얽힌 여러 인물들이 자기의 목소리를 내고 있음에도 이 소설이 일관성을 갖고 있는 것은, “너는 나로 인해”라는 책무감으로 스스로를 옥죄고 있는 인물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옛사람들 삶의 흔적이 새로웠고, 수식이 많은 문장이지만 화려하지 않고 담박했다. 말을 아끼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속마음을 공감했다. 고요한 시간에 호흡을 길게 늘이고 천천히 읽어야 좋을 소설이다.


‘나는 너로 인해’가 아닌, ‘너는 나로 인해’라는 마음을 모든 사람들이 품고 살아간다면 이해하지 못할 일도 마음도 사람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 또한 내 마음에 대하여 최대한 말을 아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 노력의 대부분은, 잘못된 노력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겨우 두 손가락으로 묶어 놓은 한 올의 매듭이, 마음이 새어나갈 구멍을 모두 막아놓아 결국은 내 마음과 네 마음이 하나라는 것을 서로 몰랐다. 내 아픔이 네 아픔이라는 것 역시 서로 몰랐다. 매듭 하나로 인해 숨을 잃은(숨소리가 사그라든다는 것은 비단 육신의 죽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터이다) 삶이 계속된다는 사실을 소설 속 그들도 몰랐고, 아니 알면서도 덮어두기를 택했으며, 나도 그랬다.

슬프기보다는 쓸쓸했다. 이해하는 법, 위로하는 법, 마음을 다잡는 법을 어쩌면 상당히 잘못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만 잠잠해진다고 해서 서러움을 다 그러안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말을 아낌으로써 마음을 가려두려는 이 버릇이 쉽게 버려질 것 같지가 않다. 버릇을 버리지 못하는 한 쓸쓸함은 또 계속될 것 같아서, 먹먹해진 마음이 풀리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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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규, 달을 먹다, 문학동네, 2007.

- 이른 아침, 겨울

빛은 열을 동반했다. 단단히 얼어붙었던 태양이 녹으면서 쩌어억 햇살에 금이 갔다. 가닥가닥 쪼개져 처마 끝으로 미끄러지는 햇살을 붙잡아 동이면 반나절치 땔깜을 아낄 수 있겠지만 사람들은 나오지 않았다. 가라앉은 말소리가 발에 채어 구들을 굴렀다. 솜 누빈 무명저고리 섶을 단단히 여미고 들어앉아 사람들이 나오지 않았다.

이른 아침이었고, 겨울이었다. 뭐든 감추기에 좋았다.




- 깊은 밤, 봄

해마다 봄이면 화기花氣에 홀린 마른 몸뚱이가 저수지로 기어들어갔다. 건져올려진 시신들은 하나같이 진흙투성이였고 사람들은 물에 헹구는 편이 낫겠다고 속으로 충고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저수지에서 물고기를 잡지 않았다.

깊은 밤이었고, 봄이었다. 미치기에 좋았다.




- 한낮, 여름

못물이 청록색으로 끓으며 조금씩 졸아들었다. 마른땅의 흙먼지가 젊은 나그네의 미투리를 파고들어 흰 버선을 더렵혔다. 활연관통豁然貫通을 소망했지만 기휘에 거꾸러질 수밖에 없었던 영혼의 소복과도 같은 색을, 그렇게 아무렇게나 말이다. 나그네는 개의치 않았다. 무력한 두개골과 비겁한 심장보다는 흙 묻은 버선발이 오히려 정갈했다. 안식은 요원해 보였다.

한낮이었고, 여름이었다. 넘치기에 좋았다.




- 다시 밤, 가을

부엉이 소리에 받친 풀벌레가 처처하게 울었다. 파동이 길었다. 물기 빠진 잎사귀들이 떨어져내렸고 나무들은 제각각 덜린 무게가 헛헛해 서러웠다.

괴로움 괴로움 괴로움일러라

베틀 위에 앉아도 괴로움 밤 가운데 들어도 괴로움 부엌 아래서도 괴로움 열두 때 어느땐들 괴롭지 않으리야

공글러 속으로 밀어넣어두었던 마음들이 추야장 잘깃한 괴로움을 어쩌지 못하고 제풀에 매워졌다. 더불어 말들도 독해졌다. ‘숫제 죽는 게……’, 그 말을 듣고 초풍하여 쥐어뜯은 가슴에 멍이 들었다. 몸이 상했든 맘이 망했든 자식은 자식이었다. 정신을 놓고 봉두난발로 배회하는 딸년을 채와 그러안고 그 밤 내내 모성이 울었다.

위배된 것들은 많았다. 산과 들이 한 해를 털어내는 걸 보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정돈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계절이 부여한 일시적인 역량이었다. 기록으로 영원히 남을 결과가 두려운 사람들이 다시 마음을 접어넣었다.

또 밤이었고, 가을이었다. 버리기에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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